BDK Perfume Gris Charnel Extrait

2026. 11. 4. 00:30ㆍLife/Fragrance

 니치 향수의 종류는 굉장히 넓다. 에르메스나 샤넬 같은 패션 하우스에서 만드는 향수들은 디자이너 향수, 여기에 속하지 않고 향수에 올인하는 브랜드들을 니치 향수로 나이브하게 나누곤 한다. 다만 세간의 인식에서는 이상한 향을 만드는 곳, 쓸데없이 고집 있는 향수를 만드는 곳이 니치 향수의 이미지라 할 수 있겠다. 애초에 "개인적인" 이란 뜻을 가진 니치가 어느 순간부터 대중픽이 되어버린 건 어쩔 수 없는 마케팅의 제물이 되어버린 것도 있다. 특정 사람을 위한 개인적인 향이 대중적이게 되면서 바뀐 부작용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향수를 하나 가져왔다. 프랑스에 거점을 두고 있는 BDK Perfume(BDK 퍼퓸)은 그렇게 흔한 향수 하우스는 아니다. 2016년에 설립된 하우스로, 파리의 이야기를 향수에 담아 책 고르듯 향수를 고르는 컨셉을 가진 대중적인 니치 하우스다. 특히 요즈음 뷰티 대기업 산하에 인수되는 니치 하우스들과 달리 BDK 퍼퓸은 아직도 독립 브랜드로 활동하고 있다. 럭셔리 니치를 표방하는 만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향을 내세우는 햐우스는 아니다. 그 대신 요즈음 향수 산업에서 대세 중 하나인 구르망 계열의 향수를 매우 잘 풀어내는 하우스로 세간에선 평가받고 있다. 국내에서도 리퀴드 퍼퓸 바에서 BDK 퍼퓸을 취급하고 있어 궁금한 사람들은 리퀴드 퍼퓸 바를 방문해보길 권한다.

 이번에 들인 향수는 BDK 퍼퓸의 베스트셀러, Gris Charnel(그리 샤르넬)의 엑스트레 버전, Gris Charnel Extrait(그리 샤르넬 엑스트레)다. 오리지널 그리 샤르넬이 무화과와 홍차, 카다멈 및 아이리스로 구성된 달달하면서도 밝은 느낌이었다면 엑스트레는 바닐라와 패츌리, 시더우드가 추가되어 더욱 크리미하면서도 어두운 느낌을 구현했다. 가격은 일본 Nose Shop 기준 100ml에 48,400엔, 한국에서도 약 30만원 후반의 비싼 가격을 가지고 있다.

 

박스 사진은 크기 문제로 접은글 처리했다.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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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수를 책처럼 다루는 BDK 퍼퓸의 패키지는 어딘가 남다르다. 검은색 패키지에 은빛 글자가 굉장히 인상적이다. 하단에는 사용된 노트들이 디테일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걸 다 맡을 수 있을까.

 뒷면에는 취급 주의사항 및 사용된 화학용제들 설명이 인쇄되어 있다. 보통 여기까진 잘 보진 않지만 흥미로워서 찍어봤다.

 그리고 옆면이 대단하다. 그리 샤르넬 엑스트레임을 강조하려는 걸까. EXTRAIT DE PARFUM이라는 글자가 무한반복중이다. 광기가 느껴질 정도라 무서웠다.

 겉 박스를 벗겨내면 한층 차분해진 속 박스가 나타난다. BDK 로고에는 유광 앰보싱 처리가 되어 있어 은은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내부 박스에는 광기가 더욱 심해졌다. 한쪽 면을 전부 EXTRAIT DE PARFUM이 채우고 있다.

 박스는 사이드로 연다. 평범하지만, 병의 색, 무게 등등 여러가지를 생각해봤을때 굉장히 고급스럽다.

 그리 샤르넬 엑스트레를 처음 보았을 때 든 생각이 있다. 평범하게 생겼는데 디자인이 대단하다. 두꺼운 사각 기둥 유리와 돔형의 뚜껑, 그리고 약간 삐뚤어져 있는 라벨까지. 필요한 것만 넣어놨단 인상이다. 조금 찾아보니 라벨 붙이는 작업도 수작업으로 이루어져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한다. 메우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캡, 즉 뚜껑 부분인데 이게 엄청 무겁다. 파리 근교에 있는 금세공 장인이 제작한 뚜껑으로 그랑 팔레의 상징적인 돔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병 또한 노르망디에서 제작되었고, 라벨은 보르도, 패키지 박스는 르망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병 자체가 하나의 프랑스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얼마나 프랑스산을 강조하고 싶은 건지 감도 안 온다. 다반 엑스트레의 경우 상대적으로 오리지널 그리 샤르넬 대비 병이 어둡다. 그래서 내부에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따라온다.

Gemini로 생성한 Gris Charnel Extrait의 노트 이미지들.

 그렇다면 이렇게 프랑스를 담은 향수, 그리 샤르넬 엑스트레의 향은 어떨까. 피부에 약 2뿌를 진행했고, 천천히 향을 음미해보기로 했다. 첫 향은 무화과 흙내음이 먼저 반겨준다. 무화과의 문안 인사 후에는 홍차와 바닐라, 스모키한 무언가가 뒤이어 따라온다. 이 구간이 정말 지금까지 맡아봤던 향수들 중 제일 좋았다. 무화과라는 과일을 다룬 향수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달큰한 무화과 향과 바닐라,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인센스의 향이 종합적으로 들어오는 향수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토바코 계열 향수와 무화과 계열 향수, 그리고 홍차 계열 향수를 한번에 믹스해놓았지만 향이 굉장히 좋게 다가왔다. 이어서 메탈릭한 향이 아로마틱하게 변주되어 살짝씩 올라오는데, 이게 아이리스와 시스투스가 만나며 만들어낸 시너지라고 느껴졌다. 메탈릭한 느낌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지만 약간은 서늘한 느낌이 드는 게 재미있었다. 마지막은 시더우드와 샌달우드, 통카빈, 패출리, 바닐라 등이 어디 숨어있었는지 다같이 나와서 앙코르 무대를 펼친다. 달콤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으로 마무리하는데 정말 환상적이다. 나의 경우 무화과 -> 홍차, 바닐라, 스모키 노트의 전환이 착향 후 15분에서 20분 사이에 이루어졌고, 이어서 약 10시간동안 아이리스, 시스투스 -> 시더우드, 샌달우드, 통카빈, 패출리, 바닐라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처음에 강렬한 인상을 주면서 점점 달콤하게 마무리하는, 한 편의 코스요리를 맛보는 듯한 향이다. 매우 복합적이고 따뜻하면서도 서늘하기에 가을, 겨울에 뿌리면 어울린다. 또한 엑스트레인만큼 지속력도 어마무시하기에 굉장히 조심해서 뿌려야 할 향수다. 하루에 2번 뿌리면 이틀은 능히 간다. 아토마이저가 누르는 대로 끝까지 밀어주는 형태였던지라 분사력이 매우 좋았다. 여러번 덧뿌리지 않아도 되게끔 배려한 느낌이다.

 

컬렉션에 들이는 두번째 차 향수인데다 블라인드 구매였던지라 매우 기대했던 향수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가끔씩 그리 샤르넬이라는 이름을 본 터라 분명 내 컬렉션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정확했다. 따뜻한 느낌을 주기에 쌀쌀한 날씨에 뿌리기에 최적이다. 하지만 상황을 막론하고 막 뿌릴 수 있는 웨어러블한 향수는 아니다. 잘 때 뿌리기엔 조금 덥긴 한데 나만 좋으면 된 게 아닐까.

 

한줄평: 무화과 바닐라 케이크 한입, 낡았지만 아늑한 참나무 집에서 차 한잔.

 


BDK Perfume Gris Charnel Extrait
정가: 100ML 기준 452,000 원
구매 이유: 진정한 "니치 향수"를 경험하기 위해.


어코드: 카다멈, 블랙티, 무화과, 아이리스, 버번 베티버, 시스투스, 샌달우드, 통카빈, 패출리, 바닐라, 시더우드
지속력: 피부에 1뿌 기준 9~10시간, 섬유에 뿌릴 경우 실내 기준 2.5일 ~. 3일

성별 및 드레스코드: 유니섹스 향수, 다만 조금 더 남성적이다.

추천 나이: 30대 초반부터 40대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