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Fragrance?

2026. 9. 27. 21:01ㆍLife/Fragrance

일전에 짧은 글을 하나 쓴 적 있다.

"New Hobby. Fragrance"라는 글이었는데, 여기선 간단하게 "향수는 음악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라고 요약했다.

여러 취미들이 있을 텐데 왜 향수인가. 짧게 요약한 것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잠깐 짬이 낫기에, 그리고 추후 공개할 프로젝트와 연관되어 있기에 왜 향수를 시작했는가에 대해 한번 글로 남겨보고자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의 필자의 향수장. 자주 쓰는 향수들을 주로 꺼내놓았다.

작은 시작, 그리고 이어지는 스노우볼

모두가 그렇듯, 첫 시작은 작은 계기에서 비롯된다. 사실 향수보다는 룸 프레그런스에 조금 더 관심이 많던 청년 1이었다. 이사 후 사람들이 내 작업실에 들릴 일이 많아지면서 주변 사람들의 작업실이나 방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향기들, 혹은 특유의 냄새들. 이런 것들을 내 방에서도 즐길 수 있었으면.이라는 간단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찾아보니 룸 스프레이나 인센스 스틱이라는 게 있더라. 처음이니까 가볍게 8천 원에 2개 주는 모 브랜드의 탈취제로 시작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평범한 방에서 탈취제를 몇 번 뿌리고 기존의 꿉꿉한 향보단 공간을 지배하는 향이 새롭게 자리 잡는 경험을 몇 번 반복하니 새로운 재미가 있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를 더 시도해 보았는데, 룸 스프레이 대신 인센스 스틱을, 인센스 스틱 대신 팔로산토 원목을, 죽향 대신 선향을. 끊임없이 반복해 가며 새로운 공간 향 찾기를 시도했다. 그러던 중 디자이너 오비가 알려준 이솝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게 모든 원흉이었다.

Aesop, 이놈의 애증의 브랜드

2026년 3월에 구입한 이솝 제품들. 몇몇 개는 다 써간다.

이솝이라는 브랜드는 몇 번 편집샵에서 만나본 적 있던 브랜드였다. 핸드크림과 핸드워시로 유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가 코로나 시국이기도 해서 어느 정도 고급을 표방하는 곳들은 이솝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 처음 이솝 매장에 방문한 게 막 이사 후 2023년 가을 즈음이었는데, 당시에 선향에 관심이 있었기에 "무라사키"라고 하는 선향 1세트를 구매했었다. 어느 산골짜기에 위치한 조용한, 그리고 인적이 거의 드문 경건한 절에서 날 법한 느낌의 향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에 지금도 한 번씩 생각날 때마다 피우는 향이기도 하다. 40 스틱에 4만 원은 비싼 감이 있지만 생각날 때마다 사 오고 있다. 이때부터였을까. 나는 이솝이라는 브랜드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후에 구매한 건 셀 수도 없었다. 바디로션, 샴푸, 로션, 면도 로션. 심지어 립밤까지 몇십 개의 제품을 샀을 거다. 특히 로션은 사용 후 얼굴에 나는 잡티 같은 것들이 확연히 줄어들어 효과도 톡톡히 봤다. 다만 이 브랜드의 단점은 가격이다. 로션 하나에 6개월 정도 쓰는데 8만 원 정도를 내라고 하면 조금 부담되는 게 현실이다. 가장 확실하게 필수불가결한 물건들(애프터쉐이브 크림, 로션)을 제외하고 다른 브랜드의 화장품 중 내게 잘 맞는 것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평소 애용하던 무인양품의 화장품들 중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때부터였을 거다. 향수에 눈을 뜬 게.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향수. 조말론 라임 바질 엔 만다린 EDC

내가 첫 번째로 쓴 향수는 이솝이 아니다. 의외로 첫 시작은 2024년 말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왔을 때 구매한 조 말론이다. 조 말론의 라임 바질 엔 만다린의 향이 생각보다 좋았기에 면세점에서 큰돈 주고 긁게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향수를 뿌리는 취미가 그렇게 없었기에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나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15미리라는 작은 용량이더라도 다 사용하는 데에는 약 2~3년이 들 정도로 잘 뿌리지 않게 되었다. 향수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돈을 쓰게 된 계기는 이솝의 카르스트다. 어렸을 때부터 소독차 소독약 향기를 좋아했고, 비 온 후 흙내음을 좋아했고, 나무 탄 향기를 좋아했던 사람에게 이솝은 좋은 시작점일 수밖에 없다. "빙하의 끝과 맞닿은 바다의 풍경"을 담아낸 향기. 카르스트가 첫 픽이 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향을 좋아하기도 했고. 이어서 선택한 향수 역시 이솝의 우라논인데, 세상 끝에서 날 법한 유황과 완전히 바짝 타버린 나무의 향은 내 기준에서 안 좋아할 수가 없는 향이었다. 다만 이 두 개의 향은 커버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적었다. 이솝이 추구하는 향은 사람에서 날 법한 향이 아닌 공간에서 풍겨올 법한 향이 많다는 평이 많은데, 나 역시도 그렇게 느끼곤 했다. 룸 스프레이 고르던 느낌을 사람에 묻히려 하니 무언가 이질적이라는 생각이 한 번씩 들었다. 그때부터 향수 브랜드들을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쓸 수 있는 향으로 처음으로 들인 향은 에르메스의 운 자르뎅 수르 닐이다. 목련 향 뒤에 숨어 있는 약간의 짭조름한 향이 인상적이었기에 봄/가을에 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이게 스노우볼이 될 줄은 몰랐다. 한번 향수를 들이고 나니 순식간이었다. 지금은 17개 정도 되는 향수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또 들일 생각을 하는 중증 취미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 들일 생각이 있냐고? 향만 좋다면야.

음악을 경험하는 방법. 마지막 열쇠는 향이다.

OSMU의 대표적 예시. 향수를 주제로 한 칵테일

 평소에 향에 관심이 많았고, 향이 사람의 감정에 미치는 느낌이 어떤지를 약 3년간 셀프 테스트를 하면서 느낀 건, 향으로 느끼는 감각 또한 무언가를 감상할 때 인상점으로 남지 않을까. 란 생각이다. OSMU라는 약자가 있는데, 원-소스-멀티-유즈 라는 약자다. 활자로 만들어진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화한다거나, 이를 웹툰화한다거나, 이걸 주제로 한 노래를 만든다거나 하는 콘텐츠화의 기본 개념이기도 하다. 이 개념을 나는 내가 소속되어 있는 팀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제작할 때 여러 번 적용해 왔다. 음악과 함께 들으며 앨범의 스토리를 감상한다거나, 음악을 들으며 퍼즐을 맞춘다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한다거나. 다만 현재까지는 시각적 감각과 청각적 감각을 사용하는 것에 그쳤다. 이젠 조금 더 감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게 향이다. 음악을 들으며 향을 맡고, 그 감정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내가 의도한 장면들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을까? 향을 앨범에 활용한다는 건 이미 아이돌 시장에서는 어느 정도 시도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자본이 자본을 낳는 아이돌 앨범들은 앨범 제작에 있어 매우 큰 교보재가 된다. 교보재가 있다면? 따라 하는 건 일도 아니다. 다만 어떻게 구현하느냐의 문제지. 한낱 개인은 아이돌 앨범처럼 하기엔 규모의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선택을 해야 한다. 포기하거나,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거나.

앨범과 맞는 향. 향과 맞는 앨범

2026.10.25 공개 예정.

2026년 10월에 낼 앨범의 마무리 작업이 끝나간다. 위에 담은 향수 일대기는 다 이것을 위한 안배라 봐도 무방하다. 다양한 향들을 경험하면서 앨범과 맞는 향을 찾는데 집중했고, 마침 기성품 중 어울리는 향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10월에 공개될 이 앨범은 표지에 향을 뿌려서 판매할 생각이다. 앨범의 콘셉트와 맞는 향이기에 더더욱 음악이 주는 느낌을 극대화하리라 믿는다. 자세한 정보는 다른 글에서 풀도록 하겠다.

 

길었지만 최근 향수에 빠져든 계기에 대해서 조금 장황하게 설명해 보았다.

콘텐츠를 위해 시작한 취미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취미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향수를 시작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경험 공유를 위해 글을 남긴다.